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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Entity Profiler (AEP)/AEP Field Note

영화 <소공녀> 3부작 2편|지켜야 할 것은 사유다 ― 우리는 어디로 가려고 이렇게 달리는가

A cinematic sunset scene overlooking a winding highway and city skyline, with a map, compass, notebook, pen, coffee mug, and books on a wooden desk. Korean text highlights the essay’s central question, “Where am I going as I keep moving this fast?”, symbolizing the difference between speed and direction in the second part of the Microhabitat three-part essay series.


그 한 잔 아래에 무엇이 있었을까

미소가 정말 지키고 있던 것은 위스키였을까.

 

그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오래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관심이 위스키라는 물건 자체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 한 잔 아래에서 실제로 계속되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는 악기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종이와 연필이 있고, 지금은 노트북이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혼자 걷는 시간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잠시 아무도 만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물론 악기가 음악 그 자체는 아니다. 노트북도 생각 그 자체는 아니다. 산책을 한다고 반드시 깊은 생각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물건이나 시간이 자신이 하던 무엇인가를 계속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다.

 

나에게도 오래 사용한 노트북을 여는 시간이 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몸이 피곤하면 오늘은 그냥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굳이 오늘까지 글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닌데 다시 노트북을 연다. 그럴 때 가끔 생각한다. 내가 지키려는 것이 정말 이 낡은 기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노트북은 바꿀 수 있다. 연필도, 종이도 바꿀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물건 자체보다 그것을 통해 계속할 수 있는 무엇인가일지 모른다.

 

그래서 미소의 한 잔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것이 미소에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내가 말할 수 없다. 그 한 잔이 어떤 의미였는지 영화 속 인물을 대신해 설명할 수도 없다. 다만 눈에 보이는 물건과 그 물건을 통해 이어지는 무엇인가는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곧바로 불편한 질문이 따라왔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생각이 그렇게 중요한가.

 

배가 고픈 사람에게 생각할 시간을 지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달 월세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삶의 방향을 물어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고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하루를 버텨야 하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한가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나 역시 그 반론을 쉽게 밀어낼 수 없었다. 살아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어야 하고, 잘 곳이 있어야 한다. 아프면 치료받아야 한다. 누군가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 생존은 철학적인 말 몇 마디로 대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생각이 중요하다’는 말을 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오래전에 알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정초부라는 사람이었다.

 

정초부는 1714년에 태어나 1789년에 세상을 떠난 18세기 조선의 노비 출신 시인이었다. 관련 연구와 《초부유고》를 둘러싼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여씨 집안의 노비였고, 글과 시에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 주인집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익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배움의 기회를 얻었고 훗날 노비 신분에서도 벗어났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야기는 익숙한 방향으로 끝날 것처럼 보인다. 어려운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이 재능을 인정받고, 배움의 기회를 얻고,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조금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초부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신분의 자유가 곧 생활의 안정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면천된 뒤에도 그는 나무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먹고사는 문제는 여전히 그의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생활 속에서도 시를 남겼다.

 

관련 기록에는 곡식을 얻기 어려웠던 그의 처지와 남의 집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를 바라보던 가난이 시에 남아 있다. 내가 오래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도 아마 그 근처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나는 한때 그 이야기를 ‘먹을 것이 없어도 시를 쓴 사람’이라는 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확인해보니 **“먹을 것이 없어도 나는 시를 쓴다”**는 문장이 정초부의 실제 발언이나 확인된 시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더 조용하다.

 

그는 가난했다. 생활은 안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도 시를 남겼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오히려 질문이 더 커졌다.

 

왜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시를 썼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정초부가 자신의 시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대신 설명할 수도 없다. 그가 어떤 철학을 지키기 위해 시를 썼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대신 말하기보다 그 행동 앞에서 생긴 질문을 붙잡아보기로 했다.

 

먹고사는 일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은 왜 어떤 표현을 계속하는가. 생존이 불안한데도 왜 어떤 사람은 묻고, 쓰고, 그리고, 만들고, 기록하는 일을 완전히 놓지 않는가.

 

나는 시 자체보다 그 질문을 더 오래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인간답다는 뜻도 아니다. 형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누군가는 연구한다.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린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하나의 질문을 놓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이 선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무엇을 위해 이것을 계속하는가.
다른 길은 없는가.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많은 일을 한다. 돈을 벌고, 직장을 지키고, 집을 마련하고, 가족을 돌본다. 모두 중요하다. 그것 없이는 삶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을 계속하는 것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완전히 같은 문제는 아닐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디로 갈지를 계속 묻기 위해 필요한 것도 있다.

 

둘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생존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살아야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가는 일만 계속되고 왜 살아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힘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사람은 아주 열심히 움직이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모를 수 있다.

 

정초부의 이야기를 생각하다 나는 마침내 한 문장에 도착했다.

 

지켜야 할 것은 사유다.

 

사유라는 말을 어렵게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거창한 철학책을 읽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한 번 묻는 것. 왜 이것을 원하는지 생각해보는 것. 남들이 모두 간다는 이유만으로 나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 지금의 선택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묻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을 완전히 놓지 않는 것.

 

내게 사유는 그런 쪽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아주 단순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자동차를 타고 길을 달린다고 해보자. 차가 좋다. 속도도 빠르다. 도로도 잘 닦여 있고 운전도 능숙하다. 모두 좋은 조건이다.

 

그런데 한 가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서울로 갈 것인가.
부산으로 갈 것인가.

 

목적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오히려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빠르게 달릴수록 목적지에서 더 멀어질 수도 있다.

 

삶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좋은 직장, 높은 연봉, 빠른 승진, 좋은 집, 많은 재산, 사회적 인정. 이것들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면서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한 가지 질문까지 대신 답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인가.

 

속도와 방향은 다른 문제다.

 

좋은 자동차가 목적지를 정해주지 않는다. 좋은 도로도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다. 운전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서울로 가야 할지 부산으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목적지는 따로 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유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사유는 속도를 늦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때로는 생각하기 위해 잠시 멈춰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천천히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빨리 살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할 수도 있다. 돈을 많이 벌 수도 있고, 어떤 성취를 위해 치열하게 움직일 수도 있다.

 

문제는 속도 자체가 아니다.

 

나는 어디로 가려고 이렇게 서두르고 있는가.

 

그 질문을 해보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예전에 젊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졌던 내 생각 하나도 떠올랐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젊은 사람을 보면 한때 나는 속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배부른 소리 아닌가.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 당장 생계가 급하다면 삶의 의미보다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먼저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내 판단과는 다른 가능성을 하나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앞선 세대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래 애썼기 때문에 다음 세대 중 어떤 사람은 삶의 방향에 관한 질문을 조금 더 일찍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부모가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 평생을 일했다면, 그 조건 위에서 다음 세대는 조금 더 일찍 물을 수도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가.

 

나는 이것을 오늘의 젊은 사람들을 설명하는 하나의 사회적 결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자리의 어려움도 있고, 주거비 부담도 있다. 경쟁과 불평등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분명하다. 젊은 세대가 겪는 답답함을 모두 삶의 의미라는 말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예전처럼 그런 질문 자체를 쉽게 ‘배부른 소리’라고만 생각하지 않게 됐다.

 

사람은 생존의 문제와 삶의 방향에 관한 질문을 동시에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선 세대가 잘못 살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들이 생존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애쓴 시간 덕분에 다른 질문이 조금 일찍 시작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 맞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전보다 분명해졌다.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삶의 방향까지 저절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삶의 방향을 생각한다고 해서 생존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어디로 갈지도 물어야 한다.

 

처음 이 질문을 시작하게 만든 것은 미소의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미소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니다. 좋은 집을 원하는 것이 잘못도 아니고, 안정된 직장이나 더 많은 소득을 원하는 것이 잘못도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을 바라보다 나는 한 가지 질문을 오래 붙잡게 됐다.

 

사람은 먹고사는 일과 함께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시간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살아가기 위해 많은 것을 지켜왔다. 일했고, 돈을 벌었고,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것들은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열심히 달려왔다는 사실만으로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려고 이렇게 달리고 있는가.

 

생각해야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데까지는 온 것 같다.

 

사유는 삶의 목적지를 대신 정해주지 않는다. 다만 어디로 갈 것인지 묻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그 방향을 결정하는 ‘나’는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참고자료 및 사실 확인 출처

이 글의 정초부 관련 사실은 아래 자료를 중심으로 확인했습니다. 정초부가 왜 시를 계속 썼는지에 대한 동기나 철학은 확인된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지 않고, 확인된 사실 이후에 생긴 작가의 질문과 해석으로 구분했습니다.

  • 안대회, 「18세기의 노비 시인 정초부」, 『역사비평』 94호, 2011.
    정초부의 생애와 노비 출신 시인으로서의 위치, 면천 이후의 삶과 시 세계를 확인한 핵심 학술자료.
  • 연합뉴스, 2011년 《초부유고》 발굴 관련 보도
    정초부가 어린 시절 주인집에서 글을 익혔다는 전승과 재능을 인정받아 배움의 기회를 얻은 과정, 면천 관련 기록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
  • 한국경제, 정초부의 가난과 시를 다룬 관련 기사
    곡식을 얻기 어려웠던 처지와 남의 집 저녁밥 짓는 연기를 바라보는 가난이 실제 시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
  • 경기도메모리, 정초부 관련 지역사 자료
    정초부의 학습 전승과 생활 조건, 가난 속에서 시를 남긴 배경을 보조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자료.

※ **“먹을 것이 없어도 나는 시를 쓴다”**는 문장은 현재 확인된 정초부의 실제 발언이나 정확한 시구가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작가가 오래 기억해온 이야기의 형태로만 제시하고, 확인 가능한 역사적 사실과 구분했습니다.

 

※ 본문에서 정초부의 삶을 통해 “지켜야 할 것은 사유다”, **“사유는 속도를 늦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연결한 부분은 정초부 자신의 철학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기록을 접한 뒤 이어진 작가의 사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