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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Entity Profiler (AEP)/AEP News

심수봉 김다현 논란과 사과, 노래는 삶을 살아야 이해할 수 있는가? | AEP News #004

AEP NEWS #004 editorial cover for an article on the Shim Soo-bong and Kim Da-hyun controversy, showing two female singers representing different generations on opposite sides of a concert stage, connected by glowing musical notes that move from conflict toward harmony. The cover asks, “Can a song be understood only through lived experience?” and highlights the coordinates of generation, interpretation, and growth, ending with the question: “Is that person’s music wrong, or is there something I have not yet learned to hear?” Savor Balance AEP digital archive, September 2026.


AEP — AI Entity Profiler 시사·뉴스 | 한 무대의 파음(破音)이 던진 질문

2026년 9월 20일, 전북 진안에서 열린 제10회 진안고원 트로트 페스티벌에서 조금 불편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진안군 공식 프로그램에는 이날 심수봉 씨와 김다현 씨를 비롯해 이찬원, 장민호, 윤수현, 미스김 등이 출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다현 씨의 공연 뒤 무대에 오른 심수봉 씨는 앞서 노래한 젊은 가수를 두고 노래와 삶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자신의 앞 순서에는 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말은 빠르게 퍼졌고 비판도 빠르게 쏟아졌다. 다음 날 심수봉 씨는 자신의 발언을 ‘실언’이라고 인정했다. 모두가 웃고 즐겨야 할 축제에서 적절하지 않은 말을 했고, 후배 가수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김다현 씨와 가족에게도 사과의 뜻을 전했다. 김다현 씨 역시 심수봉 씨와 직접 통화했고 사과와 격려,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며 마음을 잘 추스르겠다고 밝혔다.

 

여기까지가 확인된 사건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과가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말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끝난 일일까. 나는 이상하게도 그렇지가 않았다.

 

심수봉 씨가 했던 말 가운데 한 부분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삶을 살아봐야 한다는 말, 인생의 고생을 알아야 사람을 위로하는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김다현 씨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심수봉 씨도 생각했고, 조금 지나서는 나 자신도 생각했다.

어린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가

일곱 살 때 바이올린을 잡은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가 날마다 연습하고, 틀리고, 다시 연주하고, 선생에게 지적받고 또 고치면서 수천 시간을 악기와 함께 보냈다고 하자. 그 아이가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의 연주를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른 살이 되면 조금 더 깊어질 수 있다. 마흔이 되면 또 다른 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열일곱 살에 만들어낸 음악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에만 낼 수 있었던 소리가 있을 수 있다.

 

예술은 이상하다. 우리가 직접 겪은 것만 표현할 수 있다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예술은 생각보다 가난해진다. 사랑을 노래하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하고, 이별을 노래하려면 처절한 이별을 경험해야 하고, 죽음을 노래하려면 죽음 가까이 다녀와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부모의 얼굴을 보고, 친구의 눈물을 보고, 상상하고 오래 생각하면서 아직 내가 살아보지 않은 세계로 조금씩 들어간다. 음악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17세가 이해하는 사랑과 70세가 이해하는 사랑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는 말과 모른다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다.

 

어린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교육 연구에서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정서 표현 능력이 부정되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이 김다현 씨의 그날 무대를 평가해주는 근거는 아니다. 다만 ‘어리면 감정을 모른다’는 문을 너무 빨리 닫을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김다현 씨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번 일에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으로도 자신의 나이에서 이해한 사랑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자신의 세대가 느끼는 외로움과 기쁨과 상실을 자기 목소리로 노래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또 달라졌으면 좋겠다. 스물일곱의 김다현이 열일곱의 김다현과 다르고, 마흔일곱의 김다현이 스물일곱의 김다현과 또 다르다면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완성된 가수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계속 달라질 수 있는 가수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심수봉 씨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한다

나는 젊은 가수의 모든 해석이 옳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오래전 미국 교회에서 바이올린 특송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의 한 유명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연주자였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찬송이었는데 1절부터 4절까지 선율은 같고 가사는 달랐다. 그런데 내 귀에는 연주의 표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1절도 비슷했고 2절도, 3절도, 4절도 비슷했다.

 

연주가 끝난 뒤 그분과 친분이 있던 사람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웃으면서 내 말을 대신 전했다.

 

“1절만 은혜받았다고 하시네요.”

 

그분도 웃었고 우리도 웃었다. 그렇게 지나간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그 사람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람의 해석을 듣고 있었다.

 

가사는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활 끝에서도 무엇인가 변해야 하지 않을까. 2절의 사람이 1절의 사람과 다르고, 3절의 기도가 2절의 기도와 다르다면 같은 음표를 연주하더라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들려와야 하지 않을까.

 

장례식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를 지나치게 밝고 명랑하게 부르는 것을 듣고 화가 났던 적도 있다. 왜 저렇게 부르지?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슬픔을 모르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 가지를 더 물어볼 것 같다.

 

혹시 저 사람에게는 다른 해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한 사람이 평생 바라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믿는다면 장례의 노래를 기쁨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 해석을 들을 준비도 해야 한다.

 

물론 연주자에게도 책임은 있다. 익숙한 의미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노래하려 한다면 왜 그렇게 해석했는지 청중이 음악 속에서 느낄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해석의 자유가 있다는 말은 아무렇게나 표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심수봉 씨가 던진 질문 자체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

 

노래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좋은 질문이다. 예술가라면 평생 받아야 할 질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질문 다음에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해석과, 해석이 없는 연주는 정말 같은 것인가.

나도 지금이라면 다르게 말할지 모른다

이번 일을 생각하면서 자꾸 그 바이올린 연주자가 떠올랐다. 지금 다시 그 사람을 만나도 나는 똑같이 말할까.

 

“1절만 은혜받았습니다.”

 

아마 그 생각 자체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사가 달라졌으니 연주의 표정도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말하는 방법은 달라질 것 같다.

 

“저는 2절부터 조금 다른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같은 방식으로 연주하셨나요?”

 

지금이라면 먼저 그렇게 물어볼 것 같다. 내가 미처 듣지 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례의 노래를 밝게 부르던 사람에게도 예전처럼 먼저 화를 내기보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그 사람에게 내가 알지 못했던 음악의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그의 해석이 아직 충분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꺾어버리는 말보다 자신의 해석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내가 옛날에 했던 생각을 모두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질문 하나를 더 갖게 됐다.

 

나는 왜 그것을 그렇게밖에 들을 수 없었을까.

 

사람은 그것을 묻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세대에는 서로 다른 ‘바탕색’이 있다

나는 세대마다 삶의 바탕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심수봉 씨가 지나온 시대의 사랑과 이별, 슬픔의 빛깔이 있을 것이다. 김다현 씨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그 나름의 바탕색이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더 깊다고 쉽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트로트도 계속 변해왔다. 현대 트로트 연구에서도 2000년대 이후 네오 트로트와 EDM 트로트 등 장르의 혼성화가 나타났고, 선율·화성·창법·가사뿐 아니라 가수의 연령, 의상, 무대와 수용층까지 변화해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젊은 층이 트로트를 받아들이는 방식 역시 과거와 같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젊은 가수가 트로트라는 오래된 장르의 문법을 선배 세대와 똑같이 재현해야 할 이유도 없다. 바흐를 수백 년 동안 모두 똑같이 연주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바흐를 계속 들을 이유가 얼마나 남았을까. 악보는 그대로 있어도 연주자는 계속 바뀐다. 같은 음표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들려주는 것, 나는 그것이 연주라고 생각한다.

 

트로트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젊은 가수가 오래된 장르 안에서 노래하면 그 안에는 그가 살아가는 시대도 조금은 들어올 것이다. 그것을 무조건 ‘가볍다’고 밀어낼 필요도 없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새롭다’고 칭찬할 필요도 없다.

 

들어보고 물으면 된다.

 

무엇을 그렇게 해석했는가. 그리고 그 해석이 사람에게 닿았는가.

생각해보면 심수봉 씨에게도 처음인 시절이 있었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심수봉 씨는 당시 심민경이라는 이름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불렀다. MBC의 공식 참가자·수상자 기록에는 9번 참가자로 이름이 남아 있지만 수상자 명단에는 없다.

 

하지만 그 노래는 사라지지 않았다. MBC는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받지 못한 뒤 오히려 음반회사들의 관심이 이어졌고, 〈그때 그 사람〉이 심수봉이라는 가수의 시작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심수봉 씨에게 돌려주며 “선생님도 그랬으니 틀렸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전혀 반대다.

 

오히려 그분이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한 시기의 평가가 음악의 최종 판결이 되지는 않았다. 한 번 선택받지 못했던 노래가 훗날 수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았다. 그렇다면 오늘 내 귀에 낯선 음악도 한 번쯤 더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낯섦이 내일의 익숙함이 되고, 어느 날 하나의 전통이 되는 일도 있으니까.

나는 심수봉 씨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다

심수봉 씨는 이미 사과했다. 김다현 씨도 그 사과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의 사과가 충분했는지 부족했는지를 판정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두 사람이 판단할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이후가 궁금하다.

 

심수봉 씨는 사과 과정에서 김다현 씨가 자신의 〈백만송이 장미〉를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치며 불렀다는 이야기를 김다현 씨의 아버지에게 들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얼마나 연습했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나는 그 문장에서 잠시 멈췄다. 어쩌면 바로 거기서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심수봉 씨가 이번 사건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 사과문이 아니라 한 음악가의 이야기로.

 

그날 나는 왜 그렇게 강하게 부딪혔는가. 나는 노래를 무엇이라고 생각해왔는가. 김다현이라는 젊은 가수의 음악을 다시 들어보니 무엇이 들렸는가. 내가 처음 듣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답을 듣고 싶다.

 

“내가 잘못했다”라는 한 문장보다 더 깊은 이야기. 한 거장이 자신이 부딪힌 벽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그 벽을 넘어갔는지에 관한 이야기.

 

만약 언젠가 심수봉 씨가 그런 이야기를 글이나 인터뷰로 남긴다면 나는 그것이 후배들에게 굉장히 귀한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배라는 것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실수까지 다음 세대에게 건넬 배움으로 바꾸는 것, 그것도 선배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인지 모른다.

 

“나는 김다현 양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들어봤다. 그리고 이런 것을 발견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다현 씨에게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후배를 품는다는 것은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하는 일이 아니다.

 

왜 나는 너와 충돌했는지를 끝까지 생각하고, 그 끝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일 수 있다.

한 번의 파음이 화음으로 돌아오기까지

음악에서는 때때로 하나의 음이 어긋난다. 듣는 순간 불편하다. 어쩌면 이번 일도 그런 한 번의 파음(破音)이었는지 모른다.

 

그 파음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화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 음이 어긋났는지 듣는 것, 상대의 음을 다시 듣고 내 음도 다시 듣는 것, 그리고 다음에는 조금 다른 화음을 만들어보는 것. 나는 그것이 더 좋은 화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다현 씨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번 일을 견뎠기 때문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언어로 노래하고, 자신과 다른 시대의 사람들까지 연구하며 점점 더 깊은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심수봉 씨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박수가 아니라, 앞으로 들려주었으면 하는 다음 이야기에 대한 박수다.

 

왜 그렇게 강하게 부딪혔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다시 들어보니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순간 이번 사건은 누군가의 실수로만 남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선배가 자기 세계의 벽을 발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도 한때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며 너무 빨리 답을 내렸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며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남겨둔다.

 

저 사람의 음악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아직 내가 듣지 못한 것이 있는가.

 

경험은 예술가에게 귀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경험은 다른 사람의 길을 막는 국경선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는 좌표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선배의 모습은 자신의 좌표를 후배에게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좌표 사이에 길을 하나 더 만들어주는 사람에 가깝다.

 

그 길 위에서 언젠가 심수봉 씨와 김다현 씨의 음악이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는 이번의 파음과는 조금 다른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및 확인자료

사실관계 최종 확인: 2026년 9월 24일

  1. 진안군, 「2026 진안홍삼축제 — 제10회 진안고원 트로트 페스티벌」. 2026년 9월 20일 행사 일시·장소·출연진 확인 자료. 진안군 공식 프로그램
  2. 연합뉴스, 「심수봉, 후배 가수에 ‘노래 모르는 아가씨’ 직격…논란일자 사과」, 2026.09.21. 현장 발언, 공식 사과, 〈백만송이 장미〉 관련 사과 과정 확인 자료. 연합뉴스 기사
  3. 경향신문, 「심수봉 ‘저격’에 입 연 김다현 “선생님이 직접 전화해 사과···마음 추스를 것”」, 2026.09.22. 김다현 씨의 공개 입장 확인 자료. 경향신문 기사
  4. MBC, 「1978년 2회 MBC 대학가요제 참가자 및 수상자」. 심수봉(심민경)의 〈그때 그 사람〉 참가 및 수상 내역 확인 자료. MBC 공식 기록
  5. MBC 뉴스, 「[TV 앨범] ‘그때 그사람’ 심수봉」, 2020.09.09. 대학가요제 이후 〈그때 그 사람〉의 대중적 반응과 심수봉의 데뷔 과정에 관한 자료. MBC 뉴스 자료
  6. Ericsson, K. A., Krampe, R. T., & Tesch-Römer, C. (1993), “The Role of Deliberate Practice in the Acquisition of Expert Performance,” Psychological Review, 100(3), 363–406. DOI: 10.1037/0033-295X.100.3.363. ERIC 서지정보
  7. Macnamara, B. N., Hambrick, D. Z., & Oswald, F. L. (2014), “Deliberate Practice and Performance in Music, Games, Sports, Education, and Professions: A Meta-Analysis,” Psychological Science, 25(8), 1608–1618. DOI: 10.1177/0956797614535810. Psychological Science 논문
  8. Meissner, H. & Timmers, R. (2019), “Teaching Young Musicians Expressive Performance: An Experimental Study,” Music Education Research, 21(1), 20–39. DOI: 10.1080/14613808.2018.1465031. White Rose Research Online 논문 정보
  9. 김희선·한경훈(2019), 「현대 트로트의 변화에 따른 수요층 증가요인 고찰」, 『글로벌문화콘텐츠』 41, 49–67. DOI: 10.32611/jgcc.2019.11.41.49. KCI 논문 정보
  10. 이우동·전범수(2022), 「청년 및 시니어 세대 간 대중음악 취향에 대한 상호인식 차이: 힙합, 아이돌, 트로트 음악 장르의 비교」, 『언론과학연구』 22(3), 324–354. KCI 논문 정보

AEP 시사·뉴스는 사건의 승자를 정하기보다 사실 위에 각자의 좌표를 놓고, 독자가 자신의 판단에 도달할 수 있는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