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I Entity Profiler (AEP)/AEP Field Note

영화 <소공녀> 3부작 3편|너는 왜 그 모양이냐 ― 나다움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A cinematic evening scene with a glass of whisky, an open notebook asking “What am I good at?”, a silver laptop, stacked books, and an elderly man in a hat seated by a window overlooking the city. The warm desk light and deep blue dusk evoke memory, self-reflection, and the search for individuality in the final part of the Microhabitat three-part essay series.


오래 들었던 말에서 시작된 질문

그렇다면 그 방향을 결정하는 ‘나’는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나는 요즘 뜻밖에도 아주 오래 들었던 말에서 그 단서를 찾고 있다.

 

“너는 왜 그렇게 예민하냐.”
“남들은 그냥 넘어가는데 넌 왜 그걸 못 넘어가냐.”
“왜 굳이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느냐.”

 

조금 더 거칠게 말하면 이런 말도 있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좋은 말은 아니다. 듣는 사람을 아프게 할 수도 있고, 상대가 나를 잘못 보고 한 말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내가 고쳐야 할 행동 때문에 들은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이제 와서 멋진 의미로 뒤집어놓고 싶지는 않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장점인 것도 아니고, 이상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그곳에 숨겨진 재능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한 사람에게서 한 번 들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다른 시기에 비슷한 지점에 대해 계속 같은 말을 들었다면 어떨까. 그 사람들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만 따지기 전에 다른 질문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왜 늘 거기에서 다르게 반응했을까.

 

오십을 넘긴 어느 때였다. 어느 주차장에서 연배가 높은 한 어르신을 만났다. 지금도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옷차림이었는지, 표정이었는지,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분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예술 쪽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예술 쪽에서 일하셨어요?”

 

그분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나를 바라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조금 이어졌고, 그분은 자신이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는 취지의 여러 이야기를 했다.

 

지금의 나는 그분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당시 들었던 경력이 어디까지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증명할 생각도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분의 이력이 아니라 그날 남겨진 질문이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질문은 이랬다.

 

“너는 뭘 잘하냐?”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이가 오십을 넘었는데도 무엇을 잘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선뜻 내놓을 답이 없었다.

 

그분은 다시 찾아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리고 내 기억에는 이런 말도 남아 있다.

 

“너는 아직 네 선물도 뜯지 않았다.”

 

묘한 말이었다. 오십이 넘었는데 아직 선물을 뜯지도 않았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그 안에는 무엇이 있다는 말일까.

 

누군가는 그런 말을 들었다면 다시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나를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내가 무엇을 잘한다고 생각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이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너는 이런 사람이야”, “네가 잘하는 것은 이것이야”라고 정확하게 말해준다 해도, 내가 왜 그런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남이 나에게 붙여준 설명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가 알아보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 답을 듣지 않겠다는 대단한 독립선언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납득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내가 스스로 “아, 그래서 내가 그랬구나”라고 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이미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타인의 말은 단서가 될 수 있지만 자기 인식은 위임할 수 없다.

 

그 뒤로 나는 가끔 한 가지를 물었다.

 

내가 뭘 잘하지.

 

매일 앉아서 그 질문만 붙잡았던 것은 아니다. 일도 했고, 먹고살았고, 평소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다시 물었다. 나는 대체 뭘 잘하지.

 

그 시간이 1년 반 넘게 이어졌다.

 

답은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말하기 좋은 재능도 떠오르지 않았고, ‘아, 이것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조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투덜거리는 것은 잘했다.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친구들도 나를 ‘투덜이’라고 부르곤 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말했고, 또 따지고, 왜 그런지를 물었다.

 

1년 반 넘게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생각하다가 찾아낸 답이 투덜이라니. 나도 조금 웃겼다.

 

이걸 재능이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고쳐야 할 성격 아닌가.

 

나는 한동안 그 답에 별다른 의미를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이 하나 더 생겼다.

 

나는 무엇에 그렇게 투덜거렸을까.

 

이 질문은 조금 달랐다. 투덜거리는 성격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투덜거림이 향했던 곳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냈을 것이다. 내 성격 때문에 상대를 피곤하게 만든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좋은 의미로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오랫동안 내가 유난히 걸렸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니 묘하게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사람을 보다가도 그랬다. 제도를 보다가도 그랬다. 서비스를 이용하면서도 그랬고, 문화나 기술, 매일 사용하는 생활의 구조를 보면서도 그랬다.

 

원래 사람을 편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 오히려 사람을 더 불편하게 할 때 자꾸 걸렸다. 좋은 목적에서 시작한 제도가 실제로는 처음의 목적과 다르게 움직일 때도 이상했다. 불편을 줄이겠다는 서비스가 오히려 사용자에게 더 많은 비용과 불편을 떠넘길 때도 그랬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 정작 보호받아야 할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모습을 보면 이유가 궁금했다.

 

그럴 때 흔히 듣는 대답이 있었다.

 

“원래 그런 거야.”
“다 그렇게 해.”
“그냥 쓰면 되지.”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그 말에서 잘 멈추지 못했다.

 

왜 원래 그런 건데.
처음에는 무엇을 하려고 만든 건데.
어디에서 이렇게 달라진 거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건데.
왜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동하지.

 

생각해보니 서로 전혀 다른 불평처럼 보였는데 그 아래에는 비슷한 질문이 반복되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많이 투덜거렸다는 데 있지 않았다. 무엇을 볼 때마다 투덜거렸는지를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투덜이’라는 말만 놓고 보면 그냥 성격이다. 불평이 많고,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말로 끝낼 수 있다.

 

그런데 불평의 대상을 놓고 보니 질문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나는 무엇을 잘하지?’라고 물었다.
그다음에는 ‘나는 무엇에 투덜거리지?’라고 물었다.
조금 더 지나서는 ‘나는 무엇을 먼저 보는 사람이지?’라는 질문이 생겼다.

 

나는 왜 이것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지.
왜 다른 사람은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계속 걸리지.
왜 서로 다른 문제를 놓고도 비슷한 질문으로 돌아오지.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하자 과거에 흩어져 있던 일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 무렵 나는 AI와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를 분석해달라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그날 궁금했던 문제를 이야기했다. 어떤 날에는 제도를 이야기했고 다른 날에는 기술을 이야기했다. 음식이나 건강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묻기도 했다.

 

주제만 보면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대화가 쌓이면서 내가 계속 비슷한 모양의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씩 드러났다. AI가 그 질문들의 공통점을 문장으로 정리해 보여준 적도 있었고, 내가 던지는 질문을 인문학적인 질문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AI가 나를 무엇이라고 불렀느냐가 아니다.

 

AI가 나를 발견한 것도 아니다. 내 재능을 판정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거울에 가까웠다.

 

거울은 얼굴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미 있는 얼굴을 다시 보게 해준다. AI와의 대화도 그 정도였다. 내가 여러 문제를 두고 이미 반복해서 던지고 있던 질문들을 나란히 놓아보고, 서로 달라 보이던 것들 아래에 비슷한 모양이 있다는 것을 다시 볼 수 있게 했다.

 

주차장에서 만났던 어르신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AI 역시 답을 준 것이 아니라 내가 계속 무엇을 묻고 있었는지를 조금 더 잘 볼 수 있게 했다.

 

둘 다 단서였다.

 

결국 알아보는 일은 내 몫이었다.

 

아, 그래서 나는 자꾸 여기에서 멈췄던 것이구나. 그래서 다른 사람은 별일 아니라고 지나가는 데서 나는 계속 ‘왜’라고 물었던 것이구나.

 

그 정도를 내가 스스로 알아보는 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다움’이라는 말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설명한다. 좋아하는 음식, 음악, 영화, 자동차, 취미, 직업. 그런 것들도 분명 나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아래에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무엇을 먼저 보는가.
무엇에 걸리는가.
무엇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가.
어떤 상황을 만나면 반복해서 ‘왜’라고 묻는가.
무엇을 볼 때 현재의 모습과 원래의 목적을 비교하는가.

 

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사람마다 먼저 보는 것이 다르다면, 그 차이는 행동의 차이 이전에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예민하다는 이유로 모든 예민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투덜거리는 방식 때문에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면 고쳐야 한다. 잘못된 사실을 가지고 계속 고집한다면 그것도 고쳐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나다움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다만 반복해서 같은 종류의 지점에서 내가 다르게 반응한다면 그 이유를 한 번 들여다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행동은 고쳐야 할 수도 있다.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행동 아래에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면, 행동을 고치면서 그 질문까지 없애야 하는지는 따로 생각해볼 일이다.

 

나다움은 남과 다른 행동 하나가 아니라, 내가 반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가 대단한 무엇인가를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뒤늦게 알아본 것에 가깝다. 예전부터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나를 ‘투덜이’라고 불렀던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불평한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끔 내가 무엇 때문에 불편해하는지 한 번 더 묻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걸린 것은 무엇이지.
그 아래에서 나는 무슨 질문을 하고 있지.

 

서로 다른 문제에서 반복해온 질문을 글로 옮기고 정리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그것들을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AEP — AI Entity Profiler라고 부르는 사유의 틀도 그 과정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것 중 하나다.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답은 아니다. 아직 내가 반복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묻는지를 정리해가는 과정에 더 가깝다.

 

그러고 보니 이 긴 질문의 처음에는 영화 <소공녀>의 미소가 있었다.

 

나는 처음 미소에게 “집도 없는데 왜 위스키를 마실까”라고 묻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 행동을 곧바로 판단하지 않고 왜 그런지를 조금 더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질문이 나에게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지점은 어디였을까. 왜 거기에서 그렇게까지 반응하느냐고 했던 부분. 왜 그것을 그냥 넘기지 못하느냐고 했던 부분.

 

미소와 내가 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내가 반복해온 행동이 옳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타인을 향해 했던 한 가지 일을 나 자신에게도 해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동 하나만 보고 판결하지 않고, 그 아래를 조금 더 들여다보는 일.

 

그러면 오래전에 누군가가 했던 말 하나가 떠오를 수도 있다. 부모가 했던 말일 수도 있다. 친구나 배우자, 동료가 했던 말일 수도 있다.

 

“왜 넌 그것만 그냥 못 넘어가?”
“왜 그렇게까지 알아보려고 해?”
“왜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는데 너만 거기서 멈춰?”
“왜 너는 늘 그런 것을 궁금해해?”

 

그 말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나보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반대로 기분 나빴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버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비난이 답은 아니지만 좌표가 될 수는 있다.

 

좌표는 답이 아니다. 목적지도 아니다. 그곳으로 가라는 지시도 아니다.

 

그저 한 번 다시 들여다볼 위치다.

 

거기에는 정말 고쳐야 할 결점만 있을 수도 있다. 잘못된 고집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 특별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에게서, 여러 시기에, 비슷한 지점에 대해 같은 말을 들었다면 한 번쯤은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왜 여기에서 반복해서 멈췄을까.
왜 이것만은 그냥 지나가지 못했을까.
그 행동 아래에서 나는 계속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 역시 아직 다 알지는 못한다.

 

그 주차장의 어르신이 당시 내게서 무엇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이 투덜이라고 부르던 모습 아래에 어디까지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질문이 앞으로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이제는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던 곳을 무조건 감추지도 않고, 반대로 멋있는 장점이라고 포장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한 번 바라본다.

 

혹시 내가 반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제 이 질문은 내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누군가 내게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했던 바로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